[한국인의 솔 푸드] 곰탕 Vs. 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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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솔 푸드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국물 음식을 즐겨먹었다. 국과 찌개가 밥상에 함께 오를 정도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국물 사랑은 실로 대단하다. 한식 문화에서 국에다 밥을 말아 먹는 탕반(湯飯) 음식이 유독 발달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먼저 다산으로 인해 식구가 많았던 옛날에는 제한된 양의 재료로 많은 사람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또한 잦은 왜구의 침입과 전쟁으로 인해 쫓기 듯이 피난을 다녔던 사람들은 빠른 시간 안에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밥을 물에 말아서 후루루 마셨는데 이것이 탕반 요리의 시초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속이 헛헛해질 때면 생각나는 국물 요리 – 곰탕과 설렁탕은 대한민국의 솔 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얼핏 보면 똑같은 음식이라고 착각 할 정도로 곰탕과 설렁탕의 모습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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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과 설렁탕의 차이점

설렁탕과 곰탕의 가장 큰 차이점은 ‘뼈’에 있다. 설렁탕은 뼈를 넣어 끓이고, 곰탕은 뼈를 넣지 않는다. 설렁탕은 사골과 소머리 등 잡뼈를 넣고 고아서 국물을 낸 뒤 소량의 살코기와 허드레 고기를 따로 삶아 내는 음식이다. 반면에 곰탕은 양지, 사태 등의 살코기로 국물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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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과 설렁탕의 기원

곰탕은 ‘곰’이란 이름으로 조선시대 음식 책에도 등장하는 반가(班家)의 음식이다. 높은 영양가와 구수한 맛으로 인해 임금님 수라상인 12첩 반상에 오를 정도로 인기 있는 보양식이었다.

설렁탕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설은 조선시대 때 경칩이 지난 첫 번째 해(亥) 일, 축(丑) 시에 동대문 밖의 선농단(先農壇)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백성들과 함께하는 선농제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사를 지어 오던 우리 민족은 신에게 감사하며 햇곡식으로 만든 떡과 술을 제단에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선농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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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에서는 곰탕과 설렁탕이 몽고에서 온 음식이라는 설을 정설로 여긴다. 조선시대 영조 때 간행된 몽골어 어학서 몽어유해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음식을 한자로 ‘공탕’이라고 적고 몽골 발음으로 ‘슈루’라고 읽었다. 시간이 흘러 공탕은 곰탕이 되었고 슈루는 설렁이 되었다는 설이다.

조선 초기에는 달단족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들이 도축을 도맡았고 고기를 납품했다. 일정 부분의 고기를 도축, 납품하면 부산물이 남았을 텐데 바로 뼈 내장 꼬리 머리 피 등이다. 냉장시설이 없었으니 솥에 두루 넣고 푹 고았을 것이다. 곰탕과 설렁탕의 정확한 유래가 무엇이건 간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음식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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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퍼진 시기

소는 고조선 시대에도 사육하기는 했지만, 풀이 많지 않은 우리 땅에서는 전통적으로 귀한 고기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소 사육 정책에 따라 소고기를 싸고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서울 무교동과 청계천 수표교를 중심으로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놓은 곰탕집과 설렁탕집이 늘어났다.

설렁탕은 다른 음식보다 싸다. 고기가 아니라 뼈가 위주이고 그나마 고기도 내장 등 부산물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가격이 싸고 영양가는 풍부한 덕에 설렁탕은 ‘길거리 서민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1930년대에는 설렁탕이 인기 ‘배달음식’으로 자리잡았을 정도. 1929년도 소설에는 “설렁탕 그릇의 탑을 둘러멘 ‘뽀이’의 자전차가 사람들 사이의 물결을 바느질한다”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당시 서울에는 상당수의 설렁탕 배달꾼이 있었다.

반면 곰탕이 전국적으로 퍼졌던 것은 6·25전쟁 이후였다. 다만 만드는 방법은 지역의 입맛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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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의 지역적 차이점

곰탕은 전남의 나주 곰탕, 경북의 현풍 곰탕, 경남의 마산 곰탕, 황해도의 해주 곰탕 등이 유명하다. 현풍 곰탕과 마산 곰탕은 설렁탕처럼 사골로 깊은 맛의 육수를 내는 게 특징이다. 또 우족과 소꼬리 등의 뼈를 넣어 끓이기 때문에 색이 뽀얗고 맛이 진하다.

반면 서울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나주 곰탕은 어떻게 그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 때 나주에는 군납용 통조림 공장이 있었는데 소의 고기는 통조림에 썼고 가죽은 군용 벨트와 신발, 가방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통조림 공장에서 먹을 수 없는 부산물은 버려졌는데, 이를 마을 사람들이 주워다 고깃국을 만들어 먹은 것이 나주곰탕의 효시다. 탕을 끓이며 부산물의 노린내를 잡기 위해 국물 위에 뜨는 누런 기름기를 밤새 걷어냈다. 그 결과 영양이 뛰어나면서도 단백한 맛의 나주곰탕이 탄생했다.